(문경근 칼럼) 빛바랜 치부책을 들여다보니

▲ 빛바랜 치부책에는 삶의 애환이 담겨져 있습니다,
지금부터 42년 전 대학 졸업과 함께 결성한 계(契)가 지금껏 유지되고 있으니, 연륜이 꽤 쌓인 셈입니다. 지난 5월 초에 나는 그 계의 총무를 맡아 소위 계책이라 불리는 빛바랜 치부책 하나를 인수했습니다. 재미삼아 들여다보니 뜻밖에도 지난 일들을 반추해 볼 수 있는 많은 단서들이 발견되었습니다.

매년 두 차례씩의 총회와 가끔 열렸던 임시회에서 논의된 일들과 경비의 쓰임 등이 상세하게 적혀 있어, 당시의 모임 문화는 물론 생활상의 일면도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초대 총무의 꼼꼼하고 진솔한 기록들이 지난날을 되돌아보는 소중한 자료된 것입니다. 작은 것들이 모이고 쌓여 의미 있는 역사가 된 것입니다.

치부책의 첫 페이지를 여니, 제1회 정기총회는 1968년 2월 3일 진안군 백운면의 한 시골에 사는 친구 집에서 열렸다는 기록이 보였습니다. 1학기의 다섯 달 동안 회비가 1인당 500원이었으니 월 100원꼴이었습니다. 8명이 4,000원을 모아 그중 900원으로 탁상시계를 사서 유사 집에 선물했다는 내용도 적혀 있었습니다. 선물치고는 소박했지만 백수였던 우리들에겐 꽤 신경을 쓴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10여일 후엔 졸업식을 마친 계원들이 어울려 자축회를 가졌는데, 1인당 회비가 경비가 400원이라 적혀 있었습니다. 그날 한나절 동안 우리가 사용했던 경비 내역을 보니 웃음이 절로 나며, 시내 중심가로 나가서 졸업이라는 해방감과 자유로움을 만끽했던 기억도 함께 스쳐갑니다.

▲ 68년도 동창회비가 200원이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우리가 추렴한 돈이 총 4,000원이었는데, 먹을거리로 탕수육 2접시에 500원, 우동 400원, 백알과 정종 440원, 약주 300원, 담배 80원을 지출했다는 기록이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는 듯합니다. 당시에도 가장 저렴하고 대중적인 음식은 중화요리였던 것 같습니다. 맛도 잘 모르고 마시며 피웠을 술과 담배는 젊음을 믿고 거드럭거리던 호기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지금 같은 노래방이 없던 시절이었으니, 뒤풀이는 고성방가로 대신했던 일도 떠오릅니다. 그것이 스물 두어 살의 피 끓는 백수이자 예비교사였던 우리들의 마지막 흐트러진 모습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당시 쓰인 돈의 액수도 액수지만, 우리의 자축 상차림은 참으로 소박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모두 한시적 백수로서, 한 달 후면 예비교사의 이름을 떼고 교단에 선다는 확실한 희망을 가지고 있는 청춘들이었습니다.

치부책을 두어 장 넘기니, 지금부터 꼭 40년 전인 1970년 무렵의 쌀값을 알아볼 수 있는 귀한 기록이 눈에 띱니다. 계의 기금을 마련한다는 취지로 1인당 쌀 5말 값인 2,800원씩을 갹출했으니, 당시 쌀 한 가마 가격이 5,600원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무렵 40원이었던 우동 값이 요즘은 4,000원 내외로 100배가량 오른 것을 감안하면, 요즘 쌀값은 그 상승률이 턱 없이 낮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빛바랜 치부책의 기록은 비록 하찮은 듯 보이지만, 진솔함에서는 어느 기록 못지않습니다. 그때그때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 총무의 성실성이 오늘날에 작은 역사가 되어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합니다. 비록 낡고 보잘 것이 없지만, 요즘 나에게 기록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앞으로 총무 임기를 5년으로 하세. 그리고 여덟 명이 순차적으로 맡되, 반드시 한 차례씩은 의무적이네. 책임을 다 하려면 그때까지 모두 건강 하게나."

한 회원이 회의 말미에 우스갯소리로 던진 한마디가 생각납니다. 마지막 차례가 되는 회원은 앞으로 35년, 그러니까 99세까지는 끄떡없이 기다려야 한다는 건강의 기원이 담긴 메시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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