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근칼럼>임자 없는 지팡이의 암시

▲ 문경근교장선생님
지난 가을의 끝자락에 40년 지기 친구들과 어울려 모악산을 찾았습니다. 정상을 밟아야겠다는 정복자의 심정으로 오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등산이라기보다 산행이라는 말이 어울렸습니다. 중간쯤에 있는 암자까지만 다녀오기로 했으며, 주고받는 이야깃거리와 약간의 마실 물이 우리들이 가지고 간 전부였습니다. 그 흔한 지팡이마저 차 안에 두고 나섰습니다.

오르막길에 들어서면서부터 부실한 무릎이 먼저 아프다는 신호를 보내왔습니다. 두고 온 지팡이가 생각났지만, 때늦은 후회였습니다. 그러나 궁하면 통한다더니, 길목의 작은 바위 위에 버려진 듯 놓여진 허름한 대나무지팡이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됐다 싶어 얼른 집어든 그 하찮은 물건 덕분에 산행 길은 한결 수월해졌습니다.
그런 날 보고 친구가 던진 한 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누군가 하산 길에 두고 간 거겠지. 자네를 위해……."

무심결에 집어든 지팡이에 배려라는 암시가 실려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아차렸습니다. 그것은 버려진 것이 아니라 속 깊은 사람이 마음먹고 놓아둔 물건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친구가 깨우쳐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는 지팡이 안에 담겨 있던 더 큰 것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손잡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제법 반질반질한 게, 여러 사람의 손길을 거쳐 왔다는 것을 말해주는 듯했습니다. 오래 전부터 이어왔을 지팡이 릴레이가 나에게도 기회를 준 것이었습니다.

암자에 이르니, 마당에 심을 뗏장 더미가 한쪽에 놓여 있었습니다. 올라오는 길에 못본 척 지나쳤던 글귀와 쌓여있던 뗏장 봉지가 떠올랐습니다.
- 절에 쓰일 잔디입니다. 한 장씩만 들어다 주세요. -
무릎이 아프다는 핑계와 무심함으로 그냥 지나쳐버렸던 나는, 배려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지팡이의 의미를 손에 쥐고도 실천에 미치지 못한 게 하산 길 내내 마음에 결렸습니다. 그날 산행 길에서 얻은 허름한 지팡이의 교훈과 작은 뗏장의 깨침을 통해 사람 사는 공부 좀 했습니다.

나는 산행을 도와준 그 대나무지팡이를 처음 집어 들었던 그 바위 위에 반듯하게 놓았습니다. 뗏장의 외면에 대한 용서와 나로 하여금 지팡이 릴레이의 한 주자가 되게 해준 사람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작고 하찮다 하여 가볍게 여기지 말지니, 그 타고난 바와 생김새에 따라 모두가 값진 보배가 되는 것이다.'
원효대사의 가르침이 마음을 두드립니다. 그날도 작은 것, 하찮게 보이는 것이 나를 깨우쳐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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