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문화로 세상읽기3-사회적기업 둘레·정읍미래발전연구원 이사장 안수용

기후변화가 또 기록을 세웠다.
언론은 올해 폭염 일수가 평년 수준을 넘었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는 뭇사람의 체감과 다르다. 기상이변 급으로 대접할 만한데 그러지 않았다.
비하건대 특별할 게 없다는 말이다. 이쯤 되면 비상(非常)이 일상(日常)화한 셈. 예측할 수 있는 비상은 더 이상 비상이 아니다.
우리가 이런 세상을 살고 있다니……. 새삼 몸서리친다.

폭염이 긴 꼬리를 끌며 횡단하는 동안 지치고 성가시고 무료했다. 그런가 하면 가속 붙은 세상의 변화가 비로소 다가왔다.
기후위기, AI(인공지능), 살인 예고, 사회 전반에 난무하는 몰염치와 극단적 이기주의. 사회를 유지하는 최소한의 시스템마저 붕괴한 건 아닌지 덜컥 겁이 났다.
막막한 세상, 버거운 인생이 눈앞에 펼쳐졌다.
모든 현상이 한 곳으로 가고 있다. 디스토피아.

지난 8월 9일,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개봉되었다.
필자는 지역에서 문화탐사대를 함께 하고 있는 지인들과 함께 모처럼 영화관에서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관람했다.
이 영화는 엄태화가 확성기를 잡고 이병헌, 박서준, 박보영이 주연으로 열연을 했다..

엄태화 감독은 ‘숲’이라는 단편영화로 2012년 제11회 미장센단편영화제 대상을 받았으며 ‘가려진 시간’ 으로 2017년 대종상 영화제에서 신인감독상을 수상한 이후 7년만에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선보였다.

감독의 깊이 있는 연출과 배우들의 열연으로 전 세대를 사로잡은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개봉 3주차인 8월말 현재 누적관객수 330만명을 돌파하며 한국영화 박스오피스 1위를 굳건히 유지하고 있다.

예술의 작품성은 메타포로 드러난다.
영화를 보는 2030 관객들은 영화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남기며 열띤 호응을 보내고 있고 필자같은 중장년층 관객들은 현실을 반영한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와 여운이 가슴이 멍하게 머무른다.
이런 관점에서 이 영화는 ‘기생충’에 비견할 만하다.

영화 ‘기생충’은 2019년 개봉하고 이듬해 2월 제92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작품상 등 4개 부문을 수상했다.

한국 영화계의 쾌거였다.

나무위키는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포스트 아포칼립스, 재난, 드라마, 액션, 스릴러, 느와르, 블랙 코미디, 디스토피아 장르로 분류한다.

개봉3주차인 8월말 현재 한국영화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며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줄거리는 이렇다.

대지진 이후 폐허가 된 서울에 황궁 아파트만 남았다.
바깥에서 생존자들이 몰려들자 위협을 느낀 입주민들이 ‘영탁(이병헌)’과 구호가 된 그의 외침을 중심으로 단결한다.
“아파트는 주민의 것!”.
영탁은 외부의 침입을 깡과 결기로 차단하는 한편 생존을 위해 새 규칙을 만든다.
이것은 곧 안팎의 파멸을 초래한다.
그들은 기어이 공멸로 가는 지옥문을 열고 말았다.

이 영화는 종말적 공포와 생존 본능에 기생하여 자라고 그 힘으로 더욱 억압하는 국가폭력의 기원과 추종자이면서 동시에 소외자인 인간의 파국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좁게는 콘크리트로 구축한 문명과 생존자들의 종말을 직관적으로도 풀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콘크리트 유니버스 중 하나다. 굳이 유토피아를 찾는다면 황궁 아파트, 내 집으로만 한정된다.

그렇다면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디스토피아 세상보다, 내 집으로 한정됨으로써 오히려 집 본연의 목적을 달성하고 환기하는 황궁 아파트, ‘콘크리트 유토피아’ 속 ‘유토피아’로 시선을 돌려보자.
황궁 아파트는 내우외환에 힘겹지만, 밖에 비할 바는 아니다. 반면 문 너머 밖은 더할 수 없이 살풍경하다.
집은 끊임없이 위협받는다.
영화는 현실을 여과 없이 담았다.

물어보자.
일상화한 비상이 빗장을 열었다.
이러한 비상은 결속을 풀고 질주하는 말과 마차 같다.
자율을 잃어 방종하고 이로 인해 더욱 기우는 사회. 또한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주소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사회는, 집은, 안전한가?
‘유토피아’는 아주 멀어졌다.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디스토피아를 끌어안았다.

8월의 끝자락, 간밤에 긴 여름은 움켜잡은 멱살을 놓았다.
선선한 바람이 살갗을 쓰다듬었다.
난폭한 더위는 디스토피아를 끌어들이고, 선선한 밤바람은 디스토피아를 밀어냈다. 희망이 콘크리트를 뚫고 돋았다.
몸과 마음 구석구석 새 기운이 차올랐다.
마법처럼 우주가 바뀌는 순간, 세상을 바꾸는 찰나가 찾아왔다. 장면 전환. 다시금 딛고 선 이곳을 본다.

100년 후까지 우리 고향 정읍이 남아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어렵다.
난처해서다.
가만히 있기만 하고 하지 않으면 필경 없어질 테고, 해야 한다면 방향과 계획을 붙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있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되고 답은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는 것.
항로를 정하고 심기일전 정박지까지 나아갈 강단과 끈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제 ‘문화로 크는 정읍’은 문화가 업(業)이고 천직(天職)인 필자가 오늘의 정읍에 붙이고픈 이름이다.
또한 정읍의 정체이고 방향이고 미래가 되었으면 한다. 문화는 이제 주연(메인)의 지위를 얻었다.
더 이상 엑스타라 단역이나 조연(서브)이 아니다.
기실 문화는 의·식·주부터 정치·경제·사회·문화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모든 ‘것’을 아울러 왔다.
오래전부터 문화가 밥이었다. 앞으로 정읍은 문화로 커야한다.

내장산 사계절 관광지화, 기업 유치, 지역경제 활성화 같은 익숙한 구호는 그만하자. 오래 했지만 안 되는 줄 알지 않았는가!

영화대사에서 있지 않은가.

‘고마해라~ 마이 묵었다 아이가 ….

지금부터 문화는 호수에 파문을 일으키는 돌멩이가 될 것이다.
각성하고 심기일전해 돌멩이는 우리가 날리자. 정읍을 아끼고 가꾸고 지키고 남기자.
우리가 주인이지 않은가.
우주를 바꾸는 순간은 우리 마음에서 시작하는 법이다.
마법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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