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람이 사는법-가수 김대완>“거리 위의 작은 거인 가수 김대완의 ‘애절한 노래인생’”
전주 한옥마을에서 만난 가수 김대완의 삶은 ‘노래를 향한 항해’

▲ 길 위에서 노래하는 가수 김대완이 전주 한옥마을 노상무대에서 ‘낭만에 대하여’를 열창하고 있다.
바람’불어 좋은날‘ 전주에서 향기나는 사람을 만났다.
카메라 앵글을 향해 노래하며 겸연쩍게 던지는 미소에서 ‘진한 인생’을 봤다.
‘길위의 가수’ 김대완.

구글을 검색했다.
2002년 경향신문기사와 다양한 사연이 올라와 있었다.
지난 주말 전주 한옥마을에서 겨울바람타고 흐르는 ‘애끓는 절규’에 이끌려 ‘자석’처럼 그의 초라한(?) 무대 앞으로 다가 섰다.
그는 부산 사나이였고 대학로에서도 한때 잘 나갔던 가수였다.

화상으로 인해 그는 모자를 벗지 않는다.
겨울의 모퉁이에서 ‘낭만에 대하여’를 열창하던 가수 김대완은 ‘너무 아픈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아는 ‘낭만파’였다.


‘거리의 낭만파 가수’ 그의 이름은 김대완이다.
그는 살기위해 노래하고 노래하기 위해 살아간다.
원래 허스키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10년 넘게 사람사는 거리에서 노래를 하다보니 목소리가 변해버렸다.
그가 처음 거리공연을 시작한 것은 고향인 부산에서 였다.

통키타 하나 둘러메면 그의 발길이 닿는 곳이면 어디나 그의 콘서트 무대였다.
그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외길인생이 길을 잃고 사랑에 빠진 적도 있었다. 매일같이 노래를 들으러 와 장미꽃 한송이를 건네주던 여인과의 첫사랑 이었다”며 “사랑에 모든 걸 걸었던 3년 동안 노래를 그만뒀지만 그러나 영원할 것 같던 사랑은 한여름 밤의 꿈처럼 끝나버렸다”고 고백했다.

‘방랑시인’을 연상케하는 그의 외모가 독특했다.
키타를 메고 머리에는 ‘도리구치(?)’를 쓰고 선율에 유영한다.
얼굴의 화상자국 때문에 항상 모자를 푹 눌러쓰고 노래한다.
어린 시절 그의 인생을 바꿔놓는 커다란 아픔이 있었다.
공연 때 모자를 쓰는 이유도 두 살때 아궁이에서 떨어져 입은 화상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는 외항선원이었다.
화상으로 인한 세상의 따가운 시선이 김대완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무작정 거리로 나섰다.
부산에서 인천 월미도로 그리고 대학로로 그는 바람 따라 세상을 떠돌았다.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무대가 그의 중간 기착지였다.
마로니에 공원 무대서기전 관리인들에게 ‘문전박대’를 당하기 일쑤였지만 그는 ‘뚝심’으로 버텨냈다.

▲ 길거리 가수 김대완은 자신의 음반 판매수익의 일부를 심장병어린이 돕기에 기부하고 있다.
상이 던진 편견에 괴로워하던 그에게 노래는 삶의 유일한 ‘희망곶’이었다.
당시 그의 후배들의 도움으로 리메이크한 음반을 낼 수 있었다.
한때 가수 안치환과 함께 대학 축제 무대를 누비고 5·18 광주민주화 운동 12주년때는 ‘다시 서는 봄’이란 곡으로 오프닝 무대를 소화하기도 했다.
‘스타킹’에도 출연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가수 김대완은 “전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 수 없는 운명이었지만 노래가 친구가 되어 저만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며 “거리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친구요 스승이다”고 환하게 웃어보였다.
삶에 애환이 녹아 있는 그의 목소리는 세상의 시련에 아파하는 거리의 소시민들에게 위안이 되고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숱한 서러움의 세월을 이겨낸 가수 김대완의 절규가 오늘도 시베리아의 찬 공기를 타고 ‘군불’이 되어 거리를 휘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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