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청칼럼-이재철목사>로마의 카타콤베에서 배우는 삶의교훈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로마의 카타콤베―즉 지하묘소를 선뜻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옛날 로마제국은 로마 시내에서의 매장을 법률로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로마 교외의 땅 속에 거대한 지하묘소를 만들었습니다.

▲ 기쁘다 구주오셨네
지하4층 깊이에 너비 1m 가량의 지하도를 만들고, 그 좌우 벽에 벽감을 층층이 내어 그 벽감 마다에 죽은 사람들의 유해를 안치한 다음 벽돌이나 대리석판으로 밀폐하였습니다. 이런 형태의 지하 묘소가 거미줄같이 얽혀 있어 로마교외의 지하 묘소의 총 연장 길이가 무려 20여km에 이른다니, 그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실제로 로마의 카타콤베 속으로 들어가 옛날 시체가 안치되어 있던 층층의 벽감들 사이 지하도를 걸으면서, 그리고 그 웅대한 규모에 압도당하면서, 하필이면 지하에 그 엄청난 카타콤베를 건설한 로마인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로마의 카타콤베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그곳의 토양으로 인해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카타콤베가 만들어진 곳의 토양은 예외 없이 응회질이라고 합니다. 응회질의 토양은 얼마나 부드러운지 맨손으로도 파낼 수 있지만, 일단 공기가 닿으면 시간이 흐르면서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응회암이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별다른 기구나 기술 없이도 대를 거듭하면서 지하 4층 깊이에 길이 20여km에 이르는 거대한 지하 묘소를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우리 나라 매장보다 그들이 지하 묘소를 파는 것이 더 쉬었던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응회질은 토양이 공기와 맞닿아 응회암으로 응고되는 과정에서 시체의 썩는 냄새와 썩은 물을 완벽하게 흡수하기에 묘소로서는 최적의 환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산 사람들이 지하 묘소 속의 지하도를 언제나 왕래할 수 있었고, 더욱이 죽은 자의 시체가 안치된 벽감 앞 혹은 아래에서 가족들이 죽은 자를 기리며 거리낌없이 음식을 나눌 수도 있었습니다.

바로 이 카타콤베가 로마의 초기 교회 시절 그리스도인들의 예배 장소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입니다. 복음이 로마에 막 전파된 후 폭군 네로 황제에 의하여 기독교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공개 장소를 피하여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었고, 그때 기독교인들의 비밀집회 장소가 카타콤베였습니다. 카타콤베는 땅속이라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가 용이하였고, 만일의 경우 발각되었을 때에도 지하 묘소의 통로가 미로처럼 얽혀 있어 피신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었습니다. 이처럼 로마의 기독교가 카타콤베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써 크나큰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카타콤베란 지하 묘소라 했습니다.
아니 지하묘지 세계라함이 더 적절한 표현입니다.
오른쪽에도 왼쪽에도 위에도 아래에도 앞에도 뒤에도 있는 것이라곤 온통 죽은 시체들뿐입니다. 땅속 전체가 거대한 죽음 그 자체입니다.
그 죽음 한 가운데에서 기독교인들은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죽음 속에서 로마의 초기 기독교는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죽음을 알지 않고서는, 죽음을 직시하지 않고서는, 죽음을 외면하고서는, 결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저 죽음들이 곧 자신의 모습이요 실체임을 바르게 아는 자만,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내가 너를 위로하리라
카타콤베 속에 누워 있는 즐비한 시체들의 공통점은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의 모든 것을 고스란히 남겨 두고 왔다는 것입니다. 억만금을 소유한 부자였건 깡통만을 지닌 걸인이었건 간에 상관없이, 무엇하나 가지고 온 시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지니고 온 것이 있다면 숨이 너머간 육체이지만 그나마 이내 썩어져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그렇다면 죽음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죽음이란 모든 것을 두고 가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움켜쥐고 있던 것들을 모두 내려놓고 두 손 털고 가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곧 이런 것임을 증명해 주는 곳이 카타콤베요, 그 증거가 카타콤베의 시체들이었습니다. 바로 그 현장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예배를 드렸습니다. 무엇을 뜻함입니까? 이 세상의 그 무엇도 결코 영원히 지니고 가지 못함을 바로 아는 자만, 비로소 손을 뻗어 영원한 것을 붙들 수 있음의 의미였습니다.

초기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네로황제의 박해를 피하여 카타콤베에서 예배를 드리던 때는 주후 60년경이었습니다. 그때는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하늘에 오르신 뒤였습니다. 그대신 유대인의 절기로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님께서 교회의 주체가 되신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님께서 교회의 주관자가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초기 로마의 기독교인들은 카타콤베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또 무엇을 의미합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폭군 네로의 박해를 피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자진하여 카타콤베를 찾아가 예배드린 것 같지만, 실상은 네로의 박해를 이용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카타콤베로 인도한 분은 성령님이였음을 의미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죽음의 한 복판인 카타콤베 속에서, 죽음이란 이 세상 모든 것을 버리고 가는 것임을 증명하는 지하묘소 속에서 예배드리게 하신 분이 그 누구도 아닌 성령님이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충만한 사람이란 과연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자신 역시 예외가 될 수 없는 자신의 죽음을 직시하는 자요, 모든 것을 두고 가는 것이 죽음이란 죽음의 의미를 꿰뚫고 있는 사람―그 사람이 성령충만한 사람입니다. 그와 같은 사람만 거대한 카타콤베같은 이 세상 속에서 죽음을 뛰어 너머, 성령님을 좇아 진리를 따라 바르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새벽이 동터 오는 갈리리 바닷가―그 새벽의 정적을 깨트리고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주님을 사랑한다 함은 주님의 양들을 치고 먹이는 구체적 삶이어야 함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은 본문 18절을 통하여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주님께서 하신 이 말씀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구절로 인해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베드로의 순교를 예고하신 것으로 해석되어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말년의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한 것을 감안한다면 그와 같은 해석은 정당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와 같은 해석이 본문으로부터 몇 십년 후에 벌어질 베드로의 순교 자체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진다면, 그것은 본문의 깊은 의미를 간과해 버린 결과가 되고 맙니다.

베드로는 지금 인생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아직도 앞길이 창창한 20대 청년입니다. 주님과 함께 한 기간은 이제 겨우 3년에 불과합니다. 이 시간 이후 사도행전 즉 새시대의 막을 여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문턱에 서 있습니다. 지나간 3년이 사도가 되기 위한 수습기간이었다면, 이제 후로는 몇 십년에 걸친 사도로서의 삶이 구체적으로 펼쳐지게 됩니다. 베드로의 일생을 놓고 볼 때 지금 베드로는 한평생 중 가장 중요한 기로에 서 있습니다. 앞으로 베드로가 참된 사도로 살아갈 수 있느냐 아니냐가, 주님과 마지막으로 마주한 지금 이 순간에 의해 판가름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중요한 순간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을' 일깨워 주셨다면, 그것은 몇 십년 후에나 베드로에게 닥칠 순교 그 자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넉넉하게 분별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인생의 본질을 일깨워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베드로에게 그 어떤 인간도 예외일 수 없는 죽음-원치않는 때에 원치 않는곳에서 원치 않는 방법으로 느닷없이 엄습할 죽음을 직시하게 해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죽음의 의미를 각인 시켜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베드로 네가 지금은 젊은이라 할지라도 너 역시 반드시 무덤 속에 시체로 드러누울 수밖에 없다는 것, 그때에는 이 세상 모든 것을 고스란히 두고 갈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므로 공허한 갈릴리로 대변되는 이 세상의 것을 움켜쥐기 위하여 욕망의 허리띠를 졸라매고 밤낮 헛그물질 하느라 안달하던 손을 이제 내려 놓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두 팔을 벌려 항복하므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삶만이 죽음에 이르도록 하나님께 영광된 삶일 수 있음을, 지금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일깨워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죽음을 직시하고 죽음의 의미를 바로 깨닫는 사람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진정으로 따를 수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바로 깨달은 베드로가 이 이후 사도행전의 막을 여는 주역이 되며,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하기까지 그의 삶이 참된 사도의 삶으로 일관될 수 있었던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바꾸어 말해 4복음서가 끝나는 요한복음 21장의 마지막 단락에서 주님께서 베드로로 하여금 죽음을 알게 하시고 직시케 하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주님께서 베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시는 사랑의 증거였습니다. 죽음을 가르쳐 주는 것보다 더 큰사랑도 없습니다. 죽음을 아는 자만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있고 참된 생명을 소유한 사람의 삶만 하나님께 영광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사실을 바르게 깨닫고 나면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엇을 잃어 본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총인지를 분명히 알게 됩니다. 한평생을 사노라면 재산을 잃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건강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그것이 귀한 만큼 우리는 속상하는 아픔을 겪습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바로 그것을 되찾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발버둥을 치곤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더러운 죄인인 우리를 죽음 속에 버려 두지 않고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우리를 사랑치 않으십니까? 그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귀히 여기는 그 무엇을 잃게 하셨다면, 어찌 그 속에 하나님의 더 깊은 사랑의 의미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죽음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의 것입니다. 그 죽음의 의미가 무엇이라 했습니까? 죽음이란 모든 것을 두고 가는 것이라 했습니다. 쥐고 있던 모든 것을 툴툴 털고 빈손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무엇을 잃어 본다는 것이야말로 살아 있는 동안 죽음을 연습해 보는 것입니다. 버리는 훈련을 해보는 것입니다. 손을 터는 공부를 해보는 것입니다. 살아생전 이 훈련 없이 어떻게 어느 날 느닷없이 엄습하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 죽음을 바르게 수용할 수 있겠습니까? 죽음을 바르게 수용할 수 없는 자가 어떻게 죽음이 이르기까지 주님을 따라 바른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살아 생전 주님을 쫓아 바른 삶을 살지 못하는 자가 자신의 육체가 시체 되는 그 죽음의 순간에 어찌 죽음을 너머 하나님의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서는 날 부끄럼 없이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무엇인가를 잃어 보게 하십니다.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 죽음의 의미를 깨닫게 하시고, 모든 것을 털고 가야 하는 죽음을 연습케 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믿는 자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잃게 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엄청난 은총이요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을 잃지 않고서는 삶과 죽음을 바르게 수용할 수 없고, 그 당연한 결과로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영원히 설 수 없음을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전국민의 25%에 해당되는 2백만 여명의 양민을 학살하여 캄보디아를 온통 붉은 피로 물들였던 킬링필드의 주범 폴포트가 지난달 사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시체 사진이 지난 4월 17일 메스컴을 통하여 공개되었습니다. 수의를 걸칠 형편도 되지 못하여 남루한 옷을 입은 채 헝클어진 머리, 솜으로 틀어막힌 코, 허공을 향해 벌어진 입, 새파란 입술―한편으로 측은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의 시체 역시 빈손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그 사실을 진작부터 알았더라면, 그 역시 시체가 될 수밖에 없고 이 세상 그 무엇도 가져갈 수 없다는 사실을 바르게 알고 있었다면, 권력을 쥐고 있던 불과 3년 8개월 동안 2백만 여명을 학살하는 인간 백정은 분명히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죽음과 죽음의 의미를 직시하지 못하는 자의 삶이 얼마나 무지막지 할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입니다.

인도의 언론인이자 철학자인 M.V.카마스가 세계사에 큰 족적을 남긴 51명의 위인들이 죽음을 앞두고 남긴 마지막 말과 행동을 정리하여 「위대한 인물 51인의 마지막 행적」이란 책을 썼습니다. 그 책 속에서 특별히 두 사람의 마지막 말이 서로 대조되면서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자신의 친형제를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친아버지마저 감옥에 가두고 왕위에 올랐던 인도 무갈제국의 아우랑제브는 임종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혼자 왔다가 이제 방랑객이 되어 떠난다. 권력을 잡는 순간, 그 뒤에는 슬픔만 남았다'

왜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그에게 죽기 직전 남은 것이라고는 슬픔뿐이었겠습니까? 그 자신도 반드시 죽어야 하며, 죽음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을―권력마저도 두고 가야하는 것임을 알지 못했던 까닭입니다. 그런가 하면 미국의 흑인 인권 지도자였던 마틴 루터킹은 암살범이 쏜 흉탄에 맞아 운명하기 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마침내 자유를, 마침내 자유를 얻었다. 감사하게도 나는 마침내 자유를 얻었도다.'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흑인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불과 35세때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여 세계적 지도자의 반열에 오른 그가 겨우 39세의 젊은 나이에, 그것도 흉탄에 맞아 비명횡사한다면 얼마나 통탄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죽지 않으려 결사적으로 발버둥이라도 쳐야 마땅치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찌 죽음 앞에서 이처럼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까? 평소 그는 죽음과 죽음의 의미를 직시하며 살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원치 않는때에 원치 않는 곳에서 원치 않는 방법으로 느닷없이 죽음이 찾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세상 그 무엇에도 얽매임이 없이 자유하는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이 실은 거대한 카타콤베임이 보이십니까? 그 속에 시체로 누워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이십니까? 이 세상의 그 무엇도 가져가지 못한 채 철저하게 빈손으로 누워 있는 자신의 시체가 보이십니까? 바로 그 사람이 성령충만한 사람입니다. 죽음과 죽음의 의미를 직시하고 있는 그 사람은 날마다 주님을 따라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죽음을 아는 자의 삶은 하나님께 영광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재철목사님은 서울 양화진에 있는 백주년기념교회 담임목사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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