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정종인편집국장 칼럼>‘단풍은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산고(産苦)끝에 탄생한 보석’

▲ 단풍은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산고(産苦)끝에 탄생하는 보석이다. <국립공원 내장산을 찾은 관광객들이 단풍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이다>
가을이 익어간다.
상강(霜降)지나면서 추색(秋色)이 완연하더니 엊그제 내린 비에 색깔은 더욱 선명해졌다.
심산유곡이 아니더라도 거리에, 공원에, 캠퍼스에 단풍은 지천이다.

▲ 정종인 발행인
화선지에 물감 번지듯 빠르게 불붙는다. 폭염이 엊그제였는데 벌써 단풍이라니…. 세월 참 빠르다.
‘호남의 금강’으로 불리는 내장산에는 ‘내장 10경(景)’이 있다.

내장 10경이란 지난 2009년 국립공원내장산사무소 정장훈 소장과 뜻 있는 지역인사, 정읍시민들이 내장산 풍경 가운데 봄철 신록과 금선폭포, 우화정 물안개 등을 포함해 엄선한 절경을 말한다.

내장 10경 가운데 으뜸은 ‘滿(만)山(산)紅(홍)葉(엽)’과 ‘秋(추)嶺(령)歸(귀)月(월)’이다. 모두 가을이 빚은 비경이다.

만산홍엽은 ‘온 천지가 가을단풍으로 달아 오른다’는 의미를 담고 있고, 추령귀월은 ‘가을 산등성이 위로 밝은 달이 떠오른다’는 뜻이다.
모두 몽환적 아름다움과 계절의 신비를 담았다.
어감(語感)만으로도 맑은 바람에 영혼이 씻기는 것 같은 청량감이 든다.
여기에 청풍명월(淸風明月)까지 더하면 운치가 어떨까….

오늘 아침에도 신선한 안개를 헤치며 내장산을 산책했다.
초입엔 박무(薄霧)가 은은하더니 호수 허리춤에 다다르자 농무(濃霧)가 아연하다.
선계(仙界)가 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일까.
새벽안개가 그려낸 내장은 그저 경이로울 뿐이다. 안개 사이로 언뜻 내민 어린 단풍의 얼굴은 새색시 볼처럼 불그레하다.

하여 가을엔 삼홍(三紅)이란 말이 있나 보다. 산 붉고 사람 붉고 계곡의 물도 붉다는 뜻이다. 영롱한 햇빛을 받아 빛나는 천지는 온통 자색의 향연이다.

서래봉이 산책길이 일품이라지만 내장산하면 떠오르는 것은 역시 단풍이다.
금강이며 설악, 대둔 등 단풍을 자랑하는 많은 산이 많지만 유독 내장산 단풍을 최고로 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내장산이 지형학적으로 볼 때 태극문양의 골짜기와 협곡, 9개의 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 쌓여있어 기후변화에 따른 기온이 일정하게 내려가고 산정으로 오르는 비탈면이 가파르기 때문이다.

생태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남방계식물과 북방계식물이 식생 속에서 산 중저부 식생층의 우점종으로서 계곡부를 중심으로 단풍나무 개체수가 집단군락을 이루고 있는 것도 내장단풍이 백미인 요인으로 꼽힌다.
단풍의 사전적 의미는 기후 변화로 식물의 잎이 붉은빛이나 누런빛으로 변하는 현상이다.

가을이 되어 낮과 밤의 일교차가 커지면 식물은 겨울을 나기 위해 잎에 있는 엽록소를 분해하고 그 과정에서 나오는 색소를 밖으로 배출한다.
붉은색을 띠는 것은 안토시아닌, 오렌지와 황색은 카로테노이드 색소다. 단풍의 붉은색이나 은행나무의 노란색에는 바로 이 같은 생명과학의 메커니즘이 숨어 있는 것이다.

단풍은 따지고 보면 자신을 비우고 얻는 값진 결과물이다.
또한 겨울을 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다.
잎이 마르면서 줄기에 영양공급이 줄어들자 스스로를 가볍게하고 구조조정에 나서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색이 들고 잎이 떨어진다.
단풍은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산고(産苦)끝에 탄생하는 보석이다.

북풍한설을 이기기 위한 그들의 생존방식이 우리에게 형언할 수 없는 황홀감을 준다.
스스로 낮추고 비울수록 붉은 빛이 더 선명한 것도 단풍에게 배울 일이다.
단풍은 자신의 몸을 던져 산 붉고 물 붉고 사람까지 붉게 만든다.
그리고 말라 비틀어져 헐거워진 몸을 한 치의 미련 없이 바람에 맡긴다.
새로운 날, 따뜻한 봄을 기약하며 그렇게 떠나는 것이다.

자연에 순응하는 삶이 눈물겹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늘 감동을 준다.
가야 할 때를 알고 홀연히 길 떠나는 이의 뒷모습은 아름답다. 다산 정약용도 목민심서(牧民心書)의 정수를 꼽아달라는 후학들의 질문에 ‘맑은 선비가 가벼운 행장으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한다.

이 가을에 단풍을 보며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가 무엇인지 묵상해 보면 좋겠다. 나는 누구인가? 또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정종인/교차로신문 편집국장·밝은신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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