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인터뷰-정읍시 상동 장애인공동체 나눔의 집 설립자 문성하목사>‘노숙인 신분 극복하고 장애우공동체 설립자로 변신한 ‘오뚜기 인생‘
’날마다 군불 때며 장애우들 보살핌…법인화 시민들 한 목소리 감사

▲ 나눔의집 설립자 문성하목사
▲ 나눔의집 문성하목사가 아내 박춘아원장을 소개하며 고마움을 전하고 있다.
시베리아 기단의 남하로 추위가 엄습하는 요즘 ‘희망의 군불’이 피어오르는 곳이 있다.
‘마음의 상처’와 ‘장애의 편견’을 내려놓고 자신들만의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는 ‘장애인공동체 나눔의 집’(이하 나눔의 집)이 화제의 시설이다.
‘나눔의 집’은 내장산 자락인 정읍시 상동 양지뜸에 자리잡고 있다.

동이 트기 전 새벽시간에 어김없이 일어나 장작불을 지피는 이가 있다.
장애인공동체 나눔의 집의 설립자인 문성하 목사다.
“겨울인데 당연히 방이 따뜻해야죠”
고유가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장작을 지피고 궂은일을 도맡아하는 문 목사의 모습에서 타인에 대한 진한 사랑이 느껴졌다.

▲ 나눔의집 설립자 문성하목사
‘장애인공동체 나눔의 집’ 문성하목사는 “노숙인의 신분으로 장애인공동체를 만들어갈 때 시집와 생명의 은인이 되어준 아내에게 부끄럽지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며 “아내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헌신의 인생을 살아가겠다”고 다짐했다.


장애인들의 보금자리가 된 나눔의 집은 지난 1997년 8월 문 목사와 노숙인 두 명과 함께 지내게 되면서 나눔의 집 쉼터가 만들어 졌다.
사업실패 후 노숙자로 전락한 문 목사는 자살를 생각할 만큼 삶의 깊은 나락으로 빠졌다.
그러나 문 목사는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노숙자의 해맑은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보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자살 실패후 ‘덤’으로 사는 인생 저들을 위해 헌신하며 살아보자는 마음이 들더군요”
나눔의 집 쉼터를 만든 문성하목사는 인천에서 중소제조업체를 운영하던 경영자였다.
IMF의 여파로 부도의 위기에서 모든 것을 잃고 고향 정읍에 내려왔다.
그가 노숙자의 신분으로 고향에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자 시작한 일이 나눔의 집 노숙인 쉼터였다.

버너하나와 냄비하나 작은 방 한칸이 그가 가진 전부였다.
그가 처음 개척한 노숙인 쉼터는 비닐하우스를 개조한 산 위의 허름한 집이 처소였다.
그곳을 거쳐 간 노숙인들만 200여명에 달했다.
당시 문 목사는 노숙인들의 자립과 재활을 위한 삶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던졌다.

▲ 장애우들에게 희망을 선사하는 문성하목사와 박춘아원장 부부가 나눔의집 초창기 자녀들과 함께 여행중에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당시에는 노숙인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아 의료보장제도나 후원을 지원 받을 수 있는 지원책이 없어서 매일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때도 많았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노숙인들도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꿈을 심어주고 싶어 노숙인들과 함께 재활용사업, 음식물쓰레기사업등의 재활사업을 통해 자립과 재활을 도왔다.
날마다 비어가는 주방의 뒤주를 채우기 위해 처가는 물론 본가에도 손을 벌리기 일쑤였다.

그러다 2002년 6월 보건복지부의 정책으로 노숙인들 가운데 장애청소년들이 있는 관계로 장애인시설로 전환할 수 있었다.
‘장애우들의 보금자리’인 지금의 장애인공동체 나눔의 집을 세우는 계기가 됐다.

문 목사와 박춘아시설장, 그리고 백정록간사의 헌신이 묻어나는 나눔의집의 또다른 보물이 ‘희망을 노래하는사람들’이다.
노숙인으로 들어왔던 18세의 한 장애청소년이 드럼을 치고 싶다고 하는 말을 듣고 중고드럼을 구하게 되었고 이것이 장애인밴드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들’의 모태가 됐다.

노숙을 하던 한 장애소녀가 싱어를 맡고 정신장애를 앓고 있는 분이 신디를 배워 합류했다.
거리에서 방황하던 한 장애 청소년이 베이스기타를 배우게 되면서 모양을 갖추게 됐다.
지난 2003년 4월 장애인예술한마당에 공연을 올리게 되면서 장애인들의 꿈의 무대인 ‘장애인과 함께하는 열린음악회’도 지난해 10회째를 맞았다.

“한 장애청소년이 무언가 하고 싶다 하였을때 그 말에 귀를 귀울이고, 그러한 꿈을 가진 장애인들이 함께 모여 꿈과 희망과 용기를 주는 무대를 열어가게 해서 장애인도 한사람의 꿈을 가진 이들로 변화시킨게 가장 큰 보람입니다”
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는 문성하목사는 오늘날 장애인들을 위한 삶이 무엇인지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다.

▲ 나눔의집에서 운영하고 있는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들은 타 복지시설은 물론 미자립교회를 방문해 자신들보다 더 소외된 이웃들에게 사랑을 전하고 있다.
나눔의집에는 25명의 장애인이 거주하고 있다.
이곳에는 모든 활동의 밑바탕에 꿈과 인권이 있다.
‘시설의 장애인은 어떤 꿈을 가지고 있을까?’
나눔의집을 방문해 거주하는 장애우들에게 ‘꿈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유치원선생님이요, 장가 가는거요, 영화감독이요, 소방관이요, 저 옆에 집짓는 거요. 저는 사장님이요”

앞다퉈 자신의 꿈을 자랑하는 장애우들의 모습에서 ‘희망이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꿈이 있는 곳 나눔의 집의 하루는 그렇게 지나간다.
양지 바른 곳에 자리한 나눔의 집에는 장애인이 아닌 꿈을 가진 이들이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나눔의 집에는 거주자 대표가 있다.
거주자대표는 나눔의집에 거주하고 있는 장애우들을 대변하는 역할을 한다.
월 1회 거주자회의를 통해 의견을 제시해 문제를 해결한다.
‘나눔 인권행복위원회’의 활동이 두드러져 인권캠페인도 자체적으로 할 만큼 자율성이 있는 곳이다.

자신의 의견을 자신있게 말 할 수 있게 하는 다양한 교육과 활동이 체계적으로 진행된다.
장애인들의 배울 권리를 존중해 학교는 정읍지역 일반학교, 특수학교등 4개 학교에 다니고 있다.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전북 도내 대학에도 5명이 진학했다.
이들의 관련전공과도 영상학과, 사회복지과, CCM과등 자신의 적성과 특성에 맞는 배움을 가질 수 있게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아마 전국 장애인시설 가운데 최고 고학력 시설이 나눔의 집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거주인대표인 지병호(남, 27세,지적3급)씨는 이후 3년안에 결혼도 해야하고 자립을 할 계획인데, 지금은 나눔의집이 사회복지법인이아니라서 내가 자립할 때 자립지원금 1,000만원을 받을 수 없다며, 빨리 법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해 다소 놀라웠다. 그러한 정보와 생각을 가질수 있었던 것은 나눔의집안에 탈시설에 대한 교육은 물론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말할수 있는 교육이 있었다고 여겨졌다.

장애인의 꿈과 인권을 존중하는 나눔의집은 2011년부터 ‘예감’ 사회복지법인을 준비하고 있으며 법인설립후원자들의 작은손들이 모아져 설립자금을 마련중에 있다.
이에대해 나눔의집 박춘아원장(40)은 “경제적으로 어렵고 힘이 들 때 마다 나눔의 집을 후원해 주시고 관심과 사랑을 주신 분들의 애정 어린 손길이 있어서 여기까지 올수 있었다”고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사회복지법인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전라북도의 제도적지원이 있어야 한다고 하며 행정당국의 의지를 갖게 하는 것이 어려운 사안이라고 하며 지역민들의 관심을 호소했다.

나눔의집 설립자인 문성하목사는 샘골장애인야학교 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이에대해 문성하목사는 “우리 장애우들도 지역과 함께 소통하고 지역사회 속에서 함께하는 교육과 문화생활을 영위해야 함이 마땅하고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저녁시간이 되자 조용하던 마을에 악기소리가 들리고 노래가 울려 퍼졌다.
나눔의집 공동체의 장애인밴드 희망을 노래하는사람들의 행복한 노래와 웃음소리가 밤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밤늦은 시간이 되자 문성하목사는 어김없이 장작불을 지우기 위해 보일러실로 발걸음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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