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환의 소통하는 우리역사>

황토현 동학축제가 ‘축제의 세계화’를 확인했다.
특히 중국 남경의 태평천국혁명박물관과 학술·문화교류를 위한 협약을 가져 세계 4대농민혁명과의 국제교류와 ‘세계농민개혁포럼’을 향한 물꼬를 마련해 알찬 수확으로 평가받고 있다.
지난해 12월 중국남경 방문 이후 이번 황토현 동학축제 답방을 통해 파트너쉽을 확인하고 학술·문화교류에 원칙적인 합의를 이끌내는 성과를 거뒀다. 
1894년 제폭구민, 보국안민의 기치를 높이 들고 봉기한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기리는 황토현동학축제가 정읍시 덕천면 황토현전적지에서 화려하게 폐막됐다.
이에앞서 '동학농민혁명 세계화 사업' 일환으로 필자와 함께 태평천국혁명의 발상지인 중국 남경시와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인 한국 정읍시와의 상호 교류 협력 방안을 협의하기 위해 지난해 11월27일부터 30일까지 2박 3일간 중국 남경시 , 태펑천국역사박물관, 남경대학 등을 방문해 민간차원의 문화예술단체 문화예술공연 교류 방안과 학술 교류 및 관련 콘텐츠 교류 방안에 대한 협의를 마쳤다.태평천국역사박물관은 필자가 학술적으로 관심이 많았던 곳이기에 그 방문기를 정리해본다.

역사의 도시, 남경(南京 : 난징)

남경은 소주로 유명한 강소성(江蘇省)의 성도며 명태조의 건국지로서 남경대학살의 아픈 역사를 지닌 역사의 도시다. 총 면적이 6,516㎢에 이르는 그리 크지 않은 도시로 약 67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 거리마다 세워진 가로수인 풀라타너스와 성벽에 쌓인 많은 녹지대가 있어 차분하고 쾌적한 느낌을 주는 도시였다.
역사의 도시 남경은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나라를 세운 곳이고, 11년간 태평천국의 도읍지로 천경(天京)이라고 했던 사실과 근대에 들어서는 손문이 청왕조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둔 곳이기도 하다. 1842년 1차 아편전쟁에 패한 청나라가 중국과 조약을 체결하여 외국에 중국 본토를 개방한 곳이며, 1937년에는 남경을 점령한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이 자행됐던 곳이다.
이 중에서 남경대학살은 약 30만 명을 학살한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 중에는 군인, 민간인 부녀자, 어린 학생, 심지어 유아까지 처참하게 살해했던 것으로 밝혀져 남경대학살은 중국이 당한 이민족의 침략 중에서 잊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다.
이러한 역사 덕택에 남경에는 많은 유적지와 관광지가 있다. 또한 그들의 역사를 남겨 일반일들에게 공개하고 있는 박물관과 기념관이 있어 역사를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곳이기도 하다.

태평천국혁명이란?

아편전쟁 이후 청 정부는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하여 갖은 수단으로 국민들을 착취하였다. 이에 수많은 인민들은 압박과 착취를 견디지 못하고 반항을 시작하여 각지에서 농민봉기가 끊이지 않았으며, 결국은 중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1차 농민혁명운동인 태평천국운동(太平天國革命, 1851~1864)이 발발하였다.
1851년 홍수전(洪秀全)은 농민들을 이끌고 광서(廣西)에서 봉기하여 '태평천국(太平天國)'의 기치를 걸었다. 민중의 열렬한 옹호와 지원 속에서 태평군(太平軍)은 중국 남부의 많은 지역으로 신속하게 세력을 확장시켜 갔다. 1853년 태평천국은 남경(南京)에 도읍을 정하고, 잇달아 17개의 성(省)으로 확산되어 600여개의 도시를 점령하여 천하에 그 맹위를 떨쳤다. 태평천국은 토지균등을 원칙으로 삼아 '천조전묘제도(天朝田畝制度)'를 공포하고, 남녀평등 등의 많은 정책을 실행하였으며, 동시에 전통 유가사상에 대해서는 맹렬한 비판을 가했다.
태평천국운동의 영향으로 청왕조가 통치력을 거의 상실하게 되자, 이때를 틈타 영국과 프랑스는 청왕조에 대하여 제2차 아편전쟁(1856 1860)을 일으켰다. 영 프 연합군은 연대(烟臺) 여순(旅順)을 점령하고 다시 대고(大沽) 천진(天津)으로 진격하여 곧바로 북경에 이르러 중국의 세계 명원(名園) '모든 정원 중의 으뜸(萬園之園)'인 원명원(圓明園)을 불지르고 약탈했다.
최후에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청 정부를 협박하여 '북경조약(北京條約)'을 체결하고 중국으로부터 더욱 많은 이익과 특권을 획득하였다. 제정러시아도 이 전쟁에 개입하여 중국으로부터 영국 프랑스와 유사한 이익을 획득한 것 외에도 흑룡강 연안 지역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중국의 많은 지역을 무력으로 점거하였다.
제2차 아편전쟁 이후 청 정부는 주권을 상실하여 국가적 치욕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일시적인 안일을 위해서 외세와 결탁하여 국민의 반항을 진압하였다. 1864년 국내외 연합세력의 협공 속에서 14년간에 걸친 태평천국운동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것은 중국의 봉건 통치계급과 서양 열강 세력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던 민족운동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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