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람이 사는법-정읍 무성서원 문화해설사 김명주

▲ 무성서원에서 문화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는 김명주씨가 멋진 노래를 탐방객들에게 선물하고 있다.<사진=김영진 포토그래퍼>
▲ 사진=김영진 포토그래퍼
통키타 하나 덜렁 메면 그는 가수가 된다.
봄기운이 완연한 무성서원에 ‘앙코르와트’로 유명한 캄보디아 유학생들이 봄바람에 밀려 찾아왔다.

정읍의 보물인 무성서원에서 문화해설사로 살고 있는 김명주씨는 시와 음악과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녀의 말을 빌리면 정읍에는 불타는 세가지가 있단다.
동학농민혁명이 불타고 가을에는 단풍이 불타고 평소에는 남편과 아내의 사랑이 불탄다.

탐방객들이 오면 김명주씨는 ‘도림과 월하의 사랑이야기’가 담긴 선율을 선사한다.
멋지게 깔린 정읍사의 사랑이야기가 이날도 무성서원의 지붕을 넘었다.
정읍에 오면 문화해설사 김명주의 통키타 선율에 실린 정읍사이야기와 무성서원의 역사 이야기를 듣는 것은 또다른 ‘가치’다.

그녀는 묻는다.
“인생이 준 고마운 선물같은 친구 있으세요”

▲ 봄날 무성서원을 찾은 캄보디아 유학생들이 김명주문화해설사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선비들의 고고하고 맑은 기풍이 곳곳에 깃든 무성서원’
지상 중계…무성서원 문화해설사 김명주의 ‘지상 문화해설’

무성서원이 자리잡고 있는 이 곳 칠보는 태산 태수 최치원이 유상대를 만들어 선비들과 풍류를 즐겼던 때부터 불우헌 정극인의 상춘곡이 탄생하기까지 선비들의 고고하고 맑은 기풍이 곳곳에 깃들어 있고, 나라가 어지러울 때에는 일신의 안일을 도모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창의를 일으킨 애국정신이 살아 있는 유서 깊은 곳입니다

▲ 사진=김영진 포토그래퍼
무성서원의 사액현판과 현가루 현판은 독특한 유래와 의미를 상징합니다.
무성은 태인의 신라시대 이름이기도 하지만, 공자의 제자 자유가 노나라 무성현감으로 있을 때 백성들을 “예악(禮樂)”으로써 잘 다스려 그 고을에서 현가가 들려와 탄복했다는 일화를 본받은 최치원선생과 신잠 선생이 이 고을을 다스릴 때 그와 같이 다스렸다고 하여 태산이란 옛 지명과 사우이름이 있었음에도 무성이란 이름을 내리고, “현가지성”의 고사를 딴 현가루는 관리자가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 반드시 예악으로 해야 한다는 공자의 교화 사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무성서원은 태산사라는 생사당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태산 태수를 지낸 최치원선생이 떠나게 되자 그의 공덕을 칭송하고 기리고자 고을 선비들이 살아있는 이를 모시는 생사당을 마련했고, 그 뒤로 태인 현감으로 선정을 베풀었던 신잠선생을 비롯하여 정극인 송세림 정언충 김약묵 김관선생 등 7분의 선현들을 모시고 매년 음력 2월 중정일에 향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태산사가 서원의 이름으로 배움의 전당을 열게 된 것은 1615년이었고, 1696년에 숙종으로부터 무성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아, 선현배향과 교육을 담당하며, 지방민들의 여론의 장으로써,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시 전라북도 유일 불훼철 서원이며,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최치원(崔致遠)은 자(字)는 고운(孤雲), 해운(海雲) 또는 해부(海夫)입니다. 고려 현종(顯宗) 때인 1023년(현종 14년)에 내사령(內史令)으로 추증되었으며, 문묘(文廟)에 배향되며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諡號)를 받았습니다. 신라 사량부(沙梁部, 지금의 경주)’에서 6두품의 신분으로 태어났으며 오늘날 경주(慶州) 최씨의 시조로 여겨지고 있다.

12세의 어린 나이로 중국 당(唐) 나라로 유학을 떠나, 18세에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으며, 876년 율수현(溧水縣 현위(縣尉)로 관직에 올랐으며, 이 무렵 1부(部) 5권으로 된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을 저술했다.
말년에는 가야산(伽倻山)의 해인사(海印寺)에 머물렀습니다. 908년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를 쓸 때까지는 생존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지만, 그 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정극인(丁克仁) 영광인(靈光人), 자(子)는 가택(可宅)이며 호(號)는 불우헌(不憂軒), 태종 1년(1401) 8월 6일에 경기도 광주군 두모포리( 지금의 서울시 성동구 옥수동)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귀양에서 돌아온 그는 처가(妻家: 古縣內에 있는 九臯林氏)가 있는 태인에 내려와 초가삼간을 짓고 그 집을 불우헌이라 하였습니다.
그 뒤 문종의 부름을 받아 관직에 나갔고 주위 친구들의 권유로 53세인 1453년에 문과에 응하여 급제하였으며 1470년에 70의 나이로 벼슬에서 물러나 태인에 돌아온 1475년에 친목계를 만들어 고현동 향약의 시조를 만들었습니다. 또한 불우헌가, 불우헌곡과 같은 왕의 성은에 보답하는 노래를 읊었고 또한 상춘곡을 지어 후세에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그 뒤 1481년 8월 6일에 태인에서 돌아가니 그 나이 81세요 묘소는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은석동에 있습니다.

다음은 불우헌 정극인의 상춘곡 원문입니다.

紅塵(홍진)에 뭇친 분네 이내 生涯(생애) 엇더한고.
녯 사람 風流(풍류)를 미찰가 못 미찰가.
天地間(천지간) 男子(남자) 몸이 날만한 이 하건마는,
山林(산림)에 뭇쳐 이셔 至樂(지락)을 모를것가.
數間 茅屋(수간 모옥)을 碧溪水(벽계수) 앏픠 두고,
松竹(송죽) 鬱鬱裏(울울리)예 風月主人(풍월 주인) 되여셔라.
엇그제 겨을 지나 새봄이 도라오니,
桃花 杏花(도화 행화) 석양리(夕陽裏)예 퓌여 잇고,
綠楊芳草(녹양 방초)는 細雨中(세우 중)에 프르도다.
칼로 말아 낸가, 붓으로 그려 낸가,
造化 神功(조화 신공)이 物物(물물)마다 헌사롭다.
수풀에 우는 새는 春氣(춘기)를 못내 계워
소릐마다 嬌態(교태)로다.
物我 一體(물아 일체)어니, 興(흥)이야 다룰소냐.
柴扉(시비)예 거러보고, 亭子(정자)애 안자 보니,
逍遙 吟詠(소요 음영)하야, 山日(산일)이 寂寂(적적)한데,
閒中 眞味(한중 진미)를 알 니 업시 호재로다.
이바 니웃드라, 山水(산수) 구경 가쟈스라.
踏靑(답청)으란 오늘 하고, 浴沂(욕기)란 來日(내일) 하새.
아침에 採山(채산)하고, 나조해 釣水(조수)하새.
갓 괴여 닉은 술을 葛巾(갈건)으로 밧타 노코,
곳나모 가지 것거, 數(수) 노코 먹으리라.
和風(화풍)이 건듯 부러 綠水(녹수)를 건너오니,
청향(淸香)은 잔에 지고, 낙홍(落紅)은 옷새 진다.
樽中(준중)이 뷔엿거든 날다려 알외여라.
小童(소동) 아해다려 酒家(주가)에 술을 믈어,
얼운은 막대 집고, 아해는 술을 메고,
微吟 緩步(미음 완보)하야 시냇가의 호자 안자,
明沙(명사) 조흔 믈에 잔 시어 부어 들고,
淸流(청류)를 굽어보니, 떠오나니 桃花(도화)ㅣ로다.
武陵(무릉)이 갓갑도다. 져 매이 긘 거인고.
松間(송간) 細路(세로)에 杜鵑花(두견화)를 부치 들고,
峰頭(봉두)에 급피 올나 구름 소긔 안자 보니,
千村 萬落(천촌 만락)이 곳곳이 버러 잇네.
煙霞 日輝(연하 일휘)는 錦繡(금수)를 재폇는 듯.
엇그제 검은 들이 봄빗도 有餘(유여)할샤.
功名(공명)도 날 끠우고, 富貴(부귀)도 날 끠우니,
淸風 明月(청풍 명월) 外(외)예 엇던 벗이 잇사올고.
簞瓢 陋巷(단표 누항)에 흣튼 혜음 아니하네.
아모타, 百年 行樂(백년 행락)이 이만한들 엇지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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