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와이슈-‘동학농민혁명의 세계화 점검과 대안’ 국제학술대회>‘동학농민혁명 연구 성과 기반 혁명의 세계화 기틀 마련’

▲ 지난 20일 서울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동학농민혁명 제121주년 국제학술대회’에서 토론자들이 발언을 하고 있다.
정읍시가 주최하고 한국민족운동사학회와 국제한국사학회가 주관한 ‘동학농민혁명 제121주년 국제학술대회’가 ‘동학농민혁명의 세계화 어디까지 왔나! - 점검과 대안’을 주제로 지난 20일 서울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렸다.

이번 학술대회는 영어권과 유럽권, 중국과 일본 등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해외 연구성과를 점검하고 동학농민혁명의 세계화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마련됐다.

이날 학술대회는 유영렬 前국사편찬위원장의 기조강연과 ‘전주화약의 재검토와 역사적 의미’(청암대-성주현), ‘전봉준의 행적 재검토’(청암대-강효숙), ‘영어권의 동학농민혁명 연구성과와 대안’(서울대-비온티노 유리안), ‘중국의 동학농민혁명 연구성과와 대안’(중국 갑오전쟁박물관-진열), ‘일본의 동학농민혁명 연구성과와 대안’(일본 홋카이도대-이노우에 가츠오), ‘유럽권의 동학농민혁명 연구성과와 대안’(러시아 아카데미 역사연구소-드미트리 파블로프) 등 6개의 주제발표와 윤경로 前한성대 총장의 종합토론 순으로 진행됐다.

▲ 정읍시가 주최하고 한국민족운동사학회와 국제한국사학회가 주관한 ‘동학농민혁명 제121주년 국제학술대회’가 지난 20일 열렸다.
첫 번째 발제자로 나선 청암대 성주현 교수는 ‘전주화약’을 기술한 혁명 당시의 기록물들과 혁명을 연구한 연구자들의 연구 결과물 등을 토대로 현재까지 밝혀진 ‘전주화약’의 실체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했다.
먼저, ‘전주화약’에 대한 관변 측 기록과 천도교 측 기록이 전혀 상반된 상황묘사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양호전기’‘양호초토등록’‘동비토록’ 등 관변 측 기록에서는 '전주화약'이 이뤄졌다는 1894년 5월 7일을 전후해서 벌어진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즉 동학농민군의 귀순 요청과 도주, 해산, 패주를 비롯해 관군의 섬멸계획과 전주성 입성 등만이 나와 있을 뿐 '전주화약'이라는 사건 자체가 언급되지 않고 있다.

‘천도교서’‘천도교창건사’‘동학사’‘갑오동학란’ 등 천도교 측 기록에는 동학농민군과 7번의 전투를 벌였던 관군이 자체적으로 불리하다는 판단 아래, 동학농민군에 먼저 강화를 제안했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들 사료를 통해서 드러난 문제점 중의 하나는 최근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등이 주도하여 국가기념일로 제안한 ‘전주화약일’이 5월 8일(6월 11일)이 아니라 5월 7일(6월 10일)로 기술되어 있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지적된 것은 그간의 연구를 통해 ‘전주화약’에 대해서 다양한 시각으로 정리하고 있으며, 부정적인 인식이 더 우세하다는 점이다.
일찍이 동학농민혁명을 연구한 박은식, 장도빈, 김상기, 가꾸지(일본) 등은 ‘전주화약’에 대해서 초토사 홍계훈이 폐정개혁안을 먼저 제시했고, 전봉준이 전황에 따라 이를 수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반면, 관군의 전주성 공격에 잇따라 패배함으로써 불리한 상황에 처했던 동학농민군이 먼저 강화를 제안함으로써 ‘전주화약’이 이뤄졌다고 보는 학자로는 일본인 연구자 가꾸지(입장변화)와 다우치, 다보하시를 비롯해 장봉선 등이 꼽힌다.

이와 달리 김양식은 전봉준과 홍계훈의 5월 7일 ‘전주화약’을 1차 화약으로, 전봉준과 김학진의 7월 6일 만남을 2차 화약으로 분류한 뒤, 1차 화약은 관군이 주도권을 가졌고, 2차 화약은 동학농민군이 주도권을 가졌던 화약이라고 정리하였다. ‘관민상화(官民相和)’의 꽃이라 불리는 집강소(執綱所)의 설치 역시 동학농민군이 주도권을 가졌던 2차 화약의 결과로 본 것이다.

배항섭은 전주화약은 동학농민군의 주체적 역량에 의해 성립된 것이 아니라 청일군의 출병에 의한 ‘주어진 강화’로 정의하고, 그러기 때문에 전주화약을 지켜지지 않았고, 오히려 관군의 동학농민군 진압은 계속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7월 6일 양측의 합의에 의한 ‘관민상화’에 따라 집강소 체제가 가능했던 것으로 정리했다.

한편 장영민은 ‘전주화약’을 화약이 아닌 ‘전주 후퇴’ 또는 ‘전주 해산’으로 보고 있으며, 한우근은 ‘철수’로, 고석규는 ‘퇴각’으로 각각 규정하고 있다. 이와 달리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은 지난 2013년 5월 당시에는 ‘전주화약’을 전봉준과 초토사 홍계훈의 만남이 아닌 전봉준과 전라감사 김학진의 만남으로 규정한 보도자료를 배포했었다.

이러한 결과를 토대로 성 교수는 “혁명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전주화약이 갖는 중요성은 충분하지만, 전주화약에 대한 사실적 근거의 부족과 역사적 의미와 가치 부여가 쉽지 않고, 그 평가마저 여전히 혼란과 혼선을 주고 있다.”며, “충분한 연구가 선행된 후 결과를 토대로 향후 의미부여를 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국제학술대회에서 ‘전주화약’의 역사적 근거와 가치가 부족하다는 공식적인 문제가 제기됨으로써 ‘전주화약일’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해야 된다고 주장해 온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과 기념일제정추진위원회의 대응이 주목된다.

한편 이날 국제학술대회에는 외국인 연구자와 청중을 비롯하여 120여명의 모였으며, 기조강연을 맡은 유영렬 前국사편찬위원장과 종합토론에서 좌장을 맡은 윤경로 前한성대학교 총장은 국제학술대회를 통해 동학농민혁명의 세계사적인 의미와 가치를 지속적으로 확인하고, 세계적인 혁명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될 수 있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주제발표에 앞서 인사말에 나선 김생기 정읍시장은 “이번 국제학술대회를 통해 세계가 인식하고 있는 동학농민혁명 연구 성과를 기반으로, 혁명의 세계화 기틀이 마련되길 바란다.”며 “이를 토대로 한 네트워크와 인프라를 구축해 동학농민혁명의 성지 정읍의 위상 역시 강화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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