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정종인편집국장 칼럼>‘비움과 겸손을 이야기하는 것이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꽃잎의 작은 떨림에서 우주와 생명을 생각하는 안목

▲ 내가 먼저 ‘소통의 통로’가 되고 ‘마중물’이 되는 헌신의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 희망이 있습니다.<사진은 내장산에 자생하는 산수국>
밝은 세상은 배려와 섬김이 있는 세상입니다.
작은 예화로 이야기를 시작할까 합니다.
사또가 한 고을에 부임했습니다.
그러나 그 고을에 곧은 성품을 가진 한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보릿고개’속에서도 뇌물을 상납했지만 이 노인분은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괘씸하게 생각한 사또가 노인의 집을 찾았습니다.

사또를 맞은 노인이 차를 대접했습니다.
그러나 사또의 잔에 노인은 차가 넘치도록 붓습니다.
잔이 넘쳐 관복이 흠뻑 젖은 사또는 버럭 화를 냈습니다.
“이놈 지금 뭣하는 짓이냐”
그러자 노인은 태연히 답했습니다.
“차면 넘칩니다”

▲ 정종인발행인
화를 참지 못한 사또가 급하게 방을 나서다 ‘문지방’에 그만 이마를 크게 부딪쳤습니다.
그러자 이 노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숙이면 됩니다”
우리 모두가 꼭 가슴에 새겨야 할 예화인 것 같습니다.


소통이 시대의 아이콘이 되고 있습니다.
세상의 불협화음은 소통의 부재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세월호로부터 시작되어 메르스 파문까지 거듭된 ‘혼돈의 시간’도 결국 정부와 국민간의 소통의 부재가 큰 ‘걸림돌’입니다.

지난 88년 광주에 소재한 일간신문을 통해 언론계에 발을 들여 논 이후 긴 시간동안 삶의 정체성으로 자리잡은 것이 ‘세상과의 소통’과 ‘사람이 희망이 되는 세상’이었습니다.

먼 훗날 사랑하는 나의 아들들에게도 물질보다는 따뜻하게 등을 두드려주는 좋은 사람들을 유산으로 남겨주고 싶습니다.
신문사 창 밖으로 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를 보니 짧은 삶을 불꽃처럼 살다간 윤동주시인처럼 ‘참회록’을 쓰고 싶어집니다.
아름다운세상을 꿈꾸며 꽃가루를 날라 새 생명을 잉태시키는 나비의 날개짓은 참으로 신비합니다.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사랑이 세상에 넘쳐 흘렀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에 기쁜소식을 전하는 희망의 꽃으로 ‘사람냄새 가득한 정원’을 채우는 날도 기대해 봅니다.

저희 신문도 위로만 향하는 언론이 아닌 소외되고 외로운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언론, 비판을 위한 비판보다는 대안을 제시하는 언론, 섬김과 나눔을 실천하는 건강한 언론으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겨울 초입에 신문사 편집국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삶에 지친 50대 중반의 남성이었습니다.
사업실패와 병마로 인해 자살을 결심하고 무작정 어디론가 떠나려고 집을 나섰는데 승강장 앞에서 교차로신문 1면에 편집된 ‘눈속에 핀 복수초’사진과 시를 보고 마음을 돌렸다는 내용이었습니다.

▲ 정종인발행인 캐리커처
사회적 약자들과 다문화가정 구성원, 외국인근로자들의 안타까운 사연들도 들려옵니다.
내가 먼저 ‘소통의 통로’가 되고 ‘마중물’이 되는 헌신의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작은 불편이 그들에게는 위대한 희망이 됩니다.

각박해져 가는 세상에 희망의 바이러스를 전하는 것은 ‘섬김과 나눔 그리고 비움’입니다.
‘틀림이 아닌 다름’을 인정하는 생명의 공간에서는 ‘살맛나는 세상’이 가능합니다.
꽃잎의 작은 떨림에서 우주와 생명을 생각하는 안목과 보이지 않는 손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여러분들과 함께 할 수 있어 행복합니다.

돈과 똥(?)의 공통점이 있다고 합니다.
돈과 똥은 모아 놓으면 부패해 냄새가 납니다.
그러나 이들을 세상에 뿌리면 땅을 비옥하게 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샘물이 되어줄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맥아더 장군의 ‘내게 이러한 자녀를 주옵소서’라는 시의 한 귀절이 떠오릅니다.
‘겸허한 마음을 갖게 하사 참된 위로에서 오는 소박함이 있음을 알게 하시고 참된 지혜는 열린 마음에 있으며 힘은 온유함에 있음을 명심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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