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사 창간 특별프로젝트/푸른정읍의제21공동기획> '생명의 강' 동진강탐사 르뽀 4번째 이야기

 

푸른정읍의제21추진협의회에서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동진강프로젝트’그 두 번째 탐사가 지난 8월 1일 있었다.

 

 정읍에서 발원하여 서해로 흐르는 호남평야의 젖줄, 동진강

푸른정읍의제21추진협의회에서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동진강프로젝트’그 두 번째 탐사가 지난 8월 1일 있었다.

‘생명의 강 동진강은 살아 있다’ 연재르뽀는 2차탐사 구간인 섬진강댐부터 종산리 운암발전소와 섬진강수력발전소를 거쳐 화호리 구마모토농장주 가옥과 정우소수력발전소로 이어지는 탐사일정을 세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오늘 연재할 ‘생명의 강 동진강은 살아 있다’ 4편에서는 2차 탐사 집결지인 정읍시청에서부터 태인과 칠보를 거쳐 섬진강댐까지의 여정과 섬진강 시인 김용택 선생 등 지역의 역사문화도 함께 소개한다.<편집자 주 >

 

[탐사 일정 및 코스]

정읍시청 9시 집결 → 구절재

①섬진강댐

②장자골 취수구 →(여우치 마을)

③팽나무정

④종산리 운암발전소 터

⑤목욕리 내목마을(솟대)

⑥섬진강 수력발전소(칠보발전소)

 점심식사(칠보)- (태산선비문화 유물전시관 /무성서원)

 ⑦산성정수장

⑧낙양리 취입수문

⑨신태인(김제간선수로 : 왕신여고 부근)

화호리 구마모토농장주 가옥

돌아가는 길에 추가 탐사지: “정우 소수력발전소 ”

 

 동진강 1차탐사가 6월 27일 있었으니 2차 탐사까지 한달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여름휴가 기간 등 여러 가지 일정으로 탐사대원들의 일정 조율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황이 어찌되었든 탐사일정을 더 이상 늦출수 없기에 찌는 듯한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2차와 3차 탐사 일정이 8월 1일과 8월 8일로 잡혔다.

 2009년 8월 1일 토요일 오전 9시 탐사대원들은 썬크림과 썬글라스, 모자, 얼음물 등 나름대로 더위에 대비책을 세우고 집결지인 시청광장으로 모였다.

1차 탐사때 함께 했던 탐사대원들 대부분이 2차 탐사에 합류에 서로들 반갑게 인사를 한 후 동진강 뿐만 아니라 지역의 문화와 지리 등 다방면에 해박한 지식으로 탐사대원들을 감동시킨 박래철 선생이 2차탐사 구간에 대한 설명과 함께 두둑한 탐사자료를 준비해 대원들에게 나눠 주었다.

 동진강의 본류인 태인천을 위주로 진행된 2차 탐사에 대한 설명에서 박래철 선생은 “국토해양부에 문의해본 결과 조선시대까지 정읍천이 동진강의 본류였으나 일제시대 이후 섬진강댐, 동진강도수로 등 여러 가지 이유로 태인천의 수량이 정읍천의 수량보다 많아져 지금은 태인천이 본류가 되었다”고 소개하고 “대신 발원지는 여러 가지 설에도 불구하고 내장산 까치봉의 까치샘에서 흐른 물이 발원지로 인정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2차 탐사에 앞서 탐사의 안내를 맡은 박래철 선생이 오늘의 탐사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본격적인 탐사에 앞서 2차탐사에 함께 했던 탐사대원을 소개한다.

탐사의 전반적인 해설과 안내를 맡아주신 박래철씨(정읍중학교 교사), 곽상주씨(문화를사랑하는정읍사람들), 푸른정읍의제21 사회복지분과 총무 김복례씨(정읍지역자활센터 실장)와 푸른정읍의제21 송종문 자연생태문과위원장(신세계상사), 최영진씨(아름다운 사진), 채형순씨(관청초등학교 교사), 서혁기씨(태인J.C특우회장), 박영진씨(태인J.C 사무국장), 전북과학대 김한수 교수, 우리나라에 온지 22년째인 일본인 교수 가나이씨(호서대 문화기획과 교수), 사진 담당 강건양씨(정읍의제21 간사), 김효소씨(한살림 이사), 오승옥씨(인쇄나라집현전).

9시 40분 드디어 몇차례 일정이 연기되었던 동진강 2차 탐사가 시작되었다.

탐사대 일행은 두 대의 승합차에 몸을 싣고 정읍시청을 출발해 첫 번째 탐사코스인 섬진강댐으로 향했다. 정읍천의 지류인 북면의 한교천을 지나며 정읍의 지명중 아직까지 유일하게 남은 방향을 가르키는 북면에 대한 소개가 이어진다.

사실 북면은 정읍시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면이라고 불리는 것은 북면이 정읍현 소속이었을때 정읍현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 그렇게 불려지고 있다고 한다.

정읍시 지도를 놓고 보면 북면 신평리의 신정리 먹점마을이 정읍시의 정중앙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여러분도 정읍시 지도를 한번 보시라...

 차량이 칠보 축현리에 접어 들었을때 박래철 선생의 설명이 이어진다.

“칠보면 축현리는 태인의 남쪽에 위치해 있어 축현리에 있는 남고서원의 이름 역시 남쪽의 언덕에 세워진 서원이다. 남고서원은 1577년 창건하여 호남의 대성리학자 일재 이항선생과 임진왜란때 의병장 건재 김천일 선생을 배향하고 있는 곳으로 전라관찰사와 태인현감으로 부임하면 반드시 일재선생을 찾아 뵙고 가르침을 청했다고 전해진다.

칠보면 시산리에서 태인의 터줏대감으로 태산선비문화권에 대한 식견과 지역 향토문화에 많은 관심과 애착을 갖고 있는 태인J.C 특우회장인 서혁기씨와 태인J.C 사무국장인 박영진씨가 탐사대에 합류했다.

칠보면 시산리는 고은 최치원선생이 태산군수로 부임하던 시절 태산군의 관아가 있던 자리(현 칠보초등학교)로 무성서원, 정극인의 상춘곡의 배경지로 알려져 있는 지역이다.

특히, 무성서원은 사적 제166호로 고려시대에 태산사(泰山祠)를 창건해 최치원(崔致遠)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했다. 고려말에 일단 없어졌다가, 조선초인 1483년(성종 14) 정극인(丁克仁)이 세운 향학당(鄕學堂)이 있던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1549년(명종 4) 신잠(申潛)의 사당을 짓고 배향했으며, 정극인·안세림(安世琳)·정언충(鄭彦忠)·김약묵(金若默)·김관(金灌)을 추가 배향했다. 1696년(숙종 22) 최치원과 신잠의 사당을 합치고, '무성'이라는 사액을 받아 서원으로 개편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그대로 남아 있던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칠보면 시산리에 있는 무성서원. 사적 제166호로 고려시대에 태산사(泰山祠)를 창건해 최치원(崔致遠)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했다.

 내친김에, 태산선비문화권인 태인과 칠보의 역사와 유래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태산군은 본래 백제의 태시산군(太尸山郡)이었는데, 신라 때 太山으로 고쳤다(太는 泰로도 통한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에 이르러 불우헌 정극인이 향학당을 설치하였고 현감 영천 신잠이 사학(四學)을 설립하여 유학을 진흥시켰다. 그리고 1696년(조선 숙종 22년) 태인 피향정을 국고로 중건하였으니 모두 최치원 선생의 유덕을 추모하는 사업으로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유교문화의 흥성을 이루었다. 태인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백제시대 太尸山郡으로서 그 고을터가 현 칠보면 시산리에 있었으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757년(신라 경덕왕 16년) 태산군이라 일컫고 정읍·인의현 등 이웃 고을을 거느렸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영주(고부) 관찰사의 속현이 되었다가 태산현인(泰山賢人) 임몽고불화(林蒙古不花)가 몽고에 들어가 활동하다 1354년(공민왕 3년) 고려에 원병을 청하는 원나라의 사신으로 본국인 고려에 돌아오자 그 공으로 태산현을 군으로 승격시킨 것이다. 또 인의현은 백제 때 빈굴현(또는 부성)으로 그 고을터가 현 태인면 백산리에 있었던 자그마한 고을이다. 757년(신라 경덕왕 16년) 무성이라 개칭하여 태인군의 영현(嶺縣)이 되었으며 936년에는(고려 태조 19년) 인의현이라 일컫고 영주(고부) 관찰사의 영현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태산현감이 겸임하게 되어 인의현민들이 동쪽에 떨어져 있는 태산읍(칠보)에 왕래하기가 불편하여 1409년(조선 태종 9년) 두 고을을 합하여 비로소 태인이라 일컫게 되었다. 1416년(태종 16년) 8월 현감 황경돈이 고을터를 중간지점인 거산연(현 태인면 거산리)으로 옮겼으나 터가 좁아서 1418년(태종 18년) 현감 오치선이 거산리에서 다시 현재의 위치인 태인초등학교로 옮기고 1419년 현아 건물을 세웠으며, 1421년(세종 3년)에는 현감 안기가 향교성전을 세웠다.

 태인현 구역 변천 상황을 보면, 서촌면·남재이변면이 보림면, 군내면·인곡면·흥천면이 태인면으로 되었다가 다시 보림면과 합쳐서 태인면이 되었으며, 용산면·북촌면이 용북면→신태인면→신태인읍이 되었다. 옹지면·동촌면이 옹동면으로, 고현내면·남촌일변면이 칠보면으로, 산내일변면·산내이변면이 산내면으로, 산외일변면·산외이변면이 산외면이 되었다.

(태인면 자치센터 http://dong.jeongeup.go.kr/발췌 인용)

 칠보에서 섬진강수력발전소를 굽어보며 구절재를 넘어 산외면 능교에 이르렀다. 능교라는 지명도 다리에서 유래되었으며 능교의 옛지명이 능다리이다.

 어느덧 섬진강댐과 가까운 산내면 종성리에 다다랐을 무렵 박래철 선생이 뜻밖의 얘기를 들려 주었다. 산내면 종성리에는 임병찬 장군이 구한말 의병을 양성하던 창의유적지가 있는 데, 동시대를 살았던 동학농민군의 김개남 장군을 관군에게 밀고해 잡히게 했던 이가 바로 임병찬 장군이라고....

 이에 필자가 답사후 관련자료를 찾아 봤더니 다음과 같은 구한말 두 우국지사의 가슴아픈 만남의 역사가 있었다.

 “이 해(1894년) 겨울, 동학농민혁명의 주역 인물이었던 김개남이 (임병찬이 살고 있던 종성리) 이웃 너듸(四升) 마을 서영기 집에 머물고 있었다. 이때 임병찬은 김종섭을 시켜 김개남으로 하여금 더욱 안전한 종성리로 옮기도록 설득하여 같은 마을 송두용 집으로 유인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는 김송현, 임병욱, 송도용을 시켜 전라관찰사 이도재에 고발했다. 그리하여 이 해(1894년) 12월 1일, 전주에 머물고 있는 강화병방 황헌주에 의하여 잡혀갔다. 1895년 정월, 김개남을 체포한 공으로 임실 군수를 제수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또 관찰사가 쌀 20석을 보내왔으나 끝내 받지 않았다. - <정읍의병사> 164~165쪽

 이 일이 있은 이후, 임병찬 장군의 임씨 집안과 김개남 장군의 김씨 집안은 대를 이은 원수지간으로, 지금까지도 화해가 안 된 듯하다고 김 사무국장(정읍문화원 김희선씨를 가리킴)은 얘기했다. 그러면서 임병찬 장군이 포상이 탐나서 김개남 장군을 밀고한 게 아니라, 아마도 서로의 처지와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방법이 달랐기에 빚어진 비극이라고 풀이했다.

출처 : 김개남 장군과 임병찬 장군의 잘못된 만남 - 오마이뉴스

 위기에 처한 나라를 사랑하는 방법이 달랐던 임병찬 장군과 김개남 장군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들으며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진 옥정호를 왼쪽으로 끼고 탐사대가 도착한 곳은 섬진강댐이다.

1965년 12월 국내최초의 다목적댐으로 준공된 섬진강댐. 임실군 강진면 옥정리와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를 연결하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 섬진강댐(정읍시 산내면 종성리)

 임실군 운암면과 강진면·정읍 산내면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옥정호는 운암저수지· 갈담저수지· 섬진저수지등으로 불리는 섬진강 상류의 대규모 인공 호수다. 이 호수의 근원은 동진강 유역 평야지대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1920년대 말에 축조된 운암제에서부터 시작된다.1925년 설립된 동진수리조합은 수자원이 풍부한 섬진강의 물을 유역 변경시켜 동진강유역의 농경지에 공급할 목적으로 임실군 강진(江津)면 옥정(玉井)리에 곡선형 콘크리트 중력식 댐(구댐· 운암제)을 건설,1927년 12월 완공했다.

 이후 대륙침략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한반도에서의 미곡증산과 군수물자를 생산하는데 필요한 동력원을 확보할 목적으로 1940년 운암댐 하류 2.4km 지점에 새로운 댐 건설공사를 착수했다. 그러나 이 공사는 1944년 9월 세계 2차대전의 영향으로 중단됐고 1948년 8월 조선전력주식회사(현 한전)에 의해 재 착공되었으나 6·25전쟁으로 다시 일손을 놓아야 했다. 이처럼 우여곡절을 겪은 섬진강댐 사업은 1961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반영돼 그해 8월부터 공사를 재개,1965년 12월 마침내 국내최초의 다목적댐으로 준공됐다. 임실군 강진면 옥정리와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를 연결하는 지점에 위치한 이 댐은 높이 64m,길이 3백44.2m로 총저수량이 구댐의 7배인 4억6천6백만㎥에 이른다. 당시 이 저수지 명칭을 둘러싸고 전북도에서는 ‘운암호’로 명명하여 주도록 정부에 건의하였으나 대통령 재가 때 댐이 위치한 지명을 따서 ‘옥정호’로 확정됐다. 만수위 표고 1백96.5m인 섬진강 다목적댐이 건설됨에 따라 운암제는 수몰됐으며 운암면 경지면적의 70%와 8백여 동의 가옥이 물에 잠겨 주민들은 조상대대로 뿌리를 내렸던 고향을 등지고 경기도와 동진강 유역등으로 흩어져야 했다.

 이들 수몰민 2천7백여 세대의 이주·정착을 위한 후보지로 선정된 곳이 계화도 간척지다. (계화도 지역은 추후 강 하구에서 상세히 다루기로 함)계화지구 대단위농업종합개발사업은 제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1963∼1968년까지 계화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방조제를 완공하고 이후 1978년까지 10년에 걸쳐 방조제 안쪽에 조성된 해안 간척지를 개발하는 순서로 진행됐다. 즉 이 지역에 청호저수지를 축조하고 동진강 도수로·경지정리 및 도시형 주택단지 건설공사 등을 대대적으로 시행, 시범농촌을 건설한 것이다. 또한 대규모 간척사업으로 새로 조성된 농경지에 필수적인 관개용수를 확보하기위해 길이 67km의 동진강도수로를 설치, 정읍 칠보면 섬진강발전소의 방류수를 이동시켜 청호저수지에 저장한 후 농업용수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수몰민들의 이주를 유도하기 위해서는 간척 전에 어촌이었던 창북리와 의복리· 계화리에 주택 1천동을 조성해 놓았다. 이에 따라 1977∼1980년 사이에 임실 운암면 일대 수몰민 1천9백92세대가 입주,78년부터 유명한 계화도 쌀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섬진강수력발전소의 방류수가 이들 수몰민들의 가옥을 집어삼킨 옥정호를 수원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계화도 이주민들은 도수로를 통해 67km를 달려온 고향의 물로 농사를 짓고 있는 셈이다. 동진강 수자원확보를 위해 고향을 내준 임실 운암면의 수몰민들이 새로 정착한 개척지에서 고향땅에서 흘러온 농업용수를 이용, 국내 최고품질의 쌀을 생산해 내고 있는 것이다.

 동진강과 만경강의 수량이 부족해 섬진강의 물을 막아 호남평야로 공급하니, 결국 호남평야가 존재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고 있는 섬진강.

 현재는 정읍시민들의 식수 역시 섬진강의 옥정호 물이 아니던가...

 

 우리에겐 섬진강 시인 김용택 선생의 시로 인해 더욱 친근해진 섬진강.

 1996년 11월 4일자 한겨레신문을 찾아보면 전북 임실군 덕치면 장산리 진메마을 김용택 시인의 둥지를 찾은 최재봉 기자의 글이 실렸다.

 “우리가 서 있는 산내면의 섬진강 댐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갈담이라고도 부르는 임실군 강진면 소재지에 이르고, 거기서 같은 길을 10리 가량 더 가면 나오는 곳이 덕치면이다. 앞산이 좌우로 길다랗다 해서 `긴뫼(長山)'라 이름붙여졌으나 우리네 이름이 항용 그러하듯 `진메'로 통용되고 있는 섬진강변의 작은 마을이 시인의 고향이다. 전북 진안군 마령면에서 발원해 경남 하동 포구로 몸을 푸는 섬진강 5백리 물길을 두고 보자면 진메는 강의 중상류쯤에 해당한다. 그 조금 위쪽 강진면 옥정리에는 1960년대에 만들어진 섬진댐이 물을 막고 있어 댐 아래로는 수량이 매우 적다.

  순창농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인 덕치초등학교에서 후배들을 가르치고 있던 김용택씨가 시단에 얼굴을 내민 것은 1982년이었다. 82년이라면 5월 광주의 충격과 아픔이 채 가시지 않은 무렵이다. 미증유의 학살극은 사회 전체를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고, 복 없는 백성들은 애꿎은 소주병이나 작살낼 따름이었다. 그러나, 바닷가 가파른 벼랑 위에도 원추리꽃 한 송이가 피어 있듯이 숨막히는 역사의 격랑 속에도 서정의 몫은 엄연히 있었음인가. 김용택씨의 섬진강 시편들은 시대의 불인두에 데인 화인을 가만히 어루만져 주며 삶이란, 그리고 역사란 한 판 승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러주었다. 낮은 목소리로. (중략)

 이처럼 시인 김용택은 그가 몸 담고 있는 삶의 밑바탕에 섬진강이란 서정을 통해 농촌의 현실, 사회 전체의 정치.경제적 상황, 그것들의 바탕을 이루는 역사라는 큰 흐름에 두루 주목하면서 그 모든 것을 감싸려 한다는 평을 받고 있다.

 잠시 김용택 시인의 대표작 ‘섬진강1’을 음미해 보자

성옥산 자락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섬진강 옥정호의 모습이 한폭의 그림같다.

 

섬진강 1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5회로 이어짐>

  • 글/ 오승옥
  • 사진/ 강건양
  • 자료 및 탐사해설/ 박래철
  • 탐사기획/ 푸른정읍의제21(추) & 밝은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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