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사 창간 특별프로젝트/푸른정읍의제21공동기획>동진강탐사 르뽀

 정읍에서 발원하여 서해로 흐르는 호남평야의 젖줄, 동진강에 대해 푸른정읍의제21추진협의회에서는 올 한해동안 ‘동진강프로젝트’라는 다소 거창한(?) 계획을 세워 동진강의 발원지, 역사, 문화, 생태환경 등의 탐사와 조사활동을 통해 동진강과 관련한 다양한 컨텐츠 개발, 동진강 탐사전략을 수립해, 인간과 자연이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길을 확인하기 위한 지난 6월 27일 마침내 동진강탐사의 첫발을 내 디뎠습니다.

 이에 밝은신문을 통해 동진강의 생생한 탐사현장과 동진강과 관련된 역사, 문화, 생태환경 등에 대해 연재합니다.

 지난 1회에 내장저수지에서 어린이교통공원 인근의 헌수탑까지의 탐사에 이어  오늘은 그 두 번째 편으로 가자! 물길을 타고 서해를 향해라는 소제목으로 조곡천과 정읍천의 합수지점인 정읍문화원 앞쪽에서 출발하여 하모교를 거쳐 만석대교에 이르는 여정이 펼쳐집니다. 

 <편집자 주>

  

 2. 가자! 물길을 타고 서해를 향해

 


 이어 탐사대가 도착한 곳은 정읍천의 지류인 조곡천(棗谷川)과 정읍천의 아우라지(합수목:  두갈래 이상의 물이 한데 모이는 물목) 지점인 정읍문화원 앞쪽에 도착했다.

 조곡천이라는 이름은 상류쪽에 있는 마을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지금의 대림아파트 근처 마을 이름이 '대추고부'(대추골)로서 예전엔 상리 상신경동에 속하는 마을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이곳에 대추를 실은 배가 들어오다가 뒤집혀서 그 주변에 대추나무가  많이 자라게 되었고 그것이 마을의 이름으로 정해졌다고 한다.


 박선생의 설명이 이어졌다.

 “하천의 정비로 정읍천의 하상이 내려앉아 홍수예방의 기능은 제대로 하고 있지만, 지하수면이 내려감에 따라 자연샘이 사라졌습니다.” 대흥리 다리의 유래가 이어졌다.

  “정식명칭이 따로 있지만 정읍시민들이 알고 있는 대흥리다리는 입암면 대흥리가 일제시대 보천교라고 하는 신흥종교의 메카로 유명해진 이후 전국에서 찾는 이들이 정읍역에서 내린 후 입암면 대흥리까지 걸어가는 과정에서 이 다리를 건넜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어렸을적 대양리다리라고 불렀던 대흥리다리에 이런 사연이 있었을 줄 예전엔 미쳐 몰랐지요.

박선생은 호남선이 일제시대 만들어졌으니 호남선철도가 통과하는 연지동 철교와 더불어 정읍천에서는 가장 오래된 다리일 것이라는 추가설명이 이어졌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이날 처럼 가슴에 팍 와 닿은 것이 실로 얼마만인지....


 

  지금은 복개되어 잘 보이지 않는 조곡천과 삼보(三洑).

 ‘박래철의 정읍땅이야기...농소동(農所洞) 삼보들(三洑坪)을 찾아서’를 잠시 인용해 보자.


 “3개의 보는 내장저수지와 부전저수지에서 도수로를 통해 공급되는 물인데, 정읍시내를 통과하면서는 대략 조곡천의 물길과 겹치기도 한다. 제1보는 과거 각시다리 근처에 있었다고 하여 각시보로 부르고, 나머지 2보(롯데리아 근처)와 3보(서초등학교 부근)를 현재는 1보와 2보라고 부른다고 한다.


 정리하면 당시 1보는 각시다리 근처, 2보는 시기동 롯데리아 근처, 3보는 서초등 근처에 있었던 것이다.


 조곡천이 복개되기 전까지는 그 모습을 모두 확인할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복개되어 확인이 어렵다. 현재 1보와 2보는 사용이 중지되고, 현재 서초등학교 근처(도로에 수문조절기가 있는 곳)에 있는 제3보만 활용된다고 하였다.


 하지만 도심을 통과하는 도수로의 특성상 하절기 장마철엔 침수를 가중시킬 위험성이 있고, 또한 오수의 침투로 수질이 악화되어 농업용수로 계속 사용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농촌공사 관계자는 말하였다.


 현재 1보는 사라지고, 2보는 사용중지, 서초등 인근의 3보만 활용되고 있는데.......


 그래서 2001년부터 사근보(정읍교 아래)에서 취수한 정읍천의 물을 삼보들에 직접 공급하는 방법(정읍양수장)시도하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 그 수량을 늘릴 예정이며 이에 따라 시내 쪽 제3보의 기능은 조만간 완전히 용도 폐기될 것 이라고 한다.“


 계속해서 동진강의 큰 지류인 정읍천을 따라가 보자.

 정읍은 형세가 서북쪽을 향하고 있다. 물길도 역시 서북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그 형세가 전주와 몹시 닮아 있다고 한다. 이에 문사정의 곽상주씨가 거든다. “정읍천은 반궁수(反弓水)형태여서 때론 역심의 고장이라 의심을 받기도 하지만, 현재에 와서는 시대의 변화와 개혁에 대한 열망으로 다시 나타날 것이라며 탁월한 시민운동가, 지역지도자 등이 많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여기에 금강이 활처럼 휘어진 형세인 반궁수형태여서 한양에서 보면 역모를 꾀할 상이여서 차령이남이 견제의 대상이었다고 박선생께서 덧붙인다.

 정읍천의 물을 따라 하모교(정읍소방서 근처)에 다다랐다. 여기서부터 일행은 차에서 내려 입암천(천원천)과 합수되는 아우라지를 지나 속칭 ‘해평리’(상평의 아래지역이라는 뜻으로 하평(下坪)이라고 하는데 ‘해평’은 변형된 발음)에 위치한 정읍교까지 걸었다. 잡초가 우거진 왼쪽 제방을 따라 조금 걷다가 보를 횡단하여 오른쪽 제방의 자전거 도로를 걷기도 하였다. 걷던 도중 저 멀리 모촌마을의 송시열 선생의 위패를 모신 고암서원과 충무궁 이순신 장군의 위패가 모셔진 원조 충렬사격인 진산동의 유애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내 고향 정읍천의 아름다움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목련아파트 건너편에 위치한 공평동 양수장은 정읍천과 천원천이 합수되는 지점의 바로 아래에 설치한 보(洑)의 물을 양수기로 퍼 올려 주동저수지와 만수저수지로 보내 소성과 고부지역에 농업용수를 공급한다는 사실도 처음 들을 수 있었다. 정읍천의 수자원을 고부천 쪽으로 넘겨서 활용하는 일종의 유역변경식인 셈이다. 정읍천의 제방을 따라 걷는 동안 송종문씨와 최영진씨는 정읍천에 있는 갖가지 풀과 꽃들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연신 셔터를 눌러대는 직업정신과 학구열을 발휘했다. 전문가용 DSRL 카메라를 메고 온 이들은 탐사가 이어지는 동안 동진강의 생태를 앵글에 담아 냈다. 이들의 카메라에 담긴 내고향 정읍천과 만경강 일대의 생명체들은 어떤 모습일지 퍽이나 궁금했다.

 

 

 

 정읍교를 흐르는 정읍천 주변에는 세월을 낚는지 고기를 낚는지 낚시꾼들이 몇 명 보이고, 가끔씩 황새인지, 왜가리인지 빼어난 몸매를 자랑하는 새들이 우아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도 보였고 노랑어리연꽃이 정읍천의 주인인양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탐사대가 이심정(怡心亭)을 보면서 목련아파트를 지나 정읍교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무렵 정종인 정읍의제21 운영위원장이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탐사대에 합류했다. 시간은 벌써 12시를 지나고 있었다. 슬슬 배고 고파지는 시간이었지만, 갈 길이 멀어 다시 배들평야가 있고 동학농민군의 함성소리가 들릴 것 같은 만석보로 향하였다.

 차를 타고 왼쪽 제방을 따라 가는 동안 왼쪽으로는 농기구인 당그래를 닮았다는 나지막한 당그래산이 보였고 두승산에서 이어지는 망제봉이 주위를 압도했다. 옹골다리와 녹두다리를 통과하면서 부근의 덕천공단과 정읍시의 각종 환경시설(쓰레기 매립장, 하수 및 분뇨처리장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공단 아래쪽의 하천은 대체로 덕천면과 정우면의 경계를 이루며 한교천(칠보산에서 발원하여 북면 소재지를 통과하는 정읍천의 지류)을 합치기도 하였다. 한편 동진강도수로상의 낙차를 이용하여 가동된다고 하는 정우소수력발전소의 모습도 멀리서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계속해서 물길만 따라가니 평소에 보지 못했던 여러 가지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양수장, 배수장이 그중에 하나였다. 양수장(揚水場)과 배수장(排水場)의 차이에 관해 물었다. 역시 우리의 해결사 박선생님, “우리나라는 옛부터 관개농업이라 농사를 지을 때 물을 제때 공급하고 제때 빼 주어야 하는데, 물을 공급하고 빼내는 시설이 양수장과 배수장입니다.” 설명을 듣다보니 ‘나는 왜 이리 모르는 게 많지...!’ 나의 무지함에 여러차례 고개를 내둘러야 했다. 앞으로 얼마나 더 고개를 내 둘러야 할지...


 드디어 오늘 탐사일정의 중간지점인 만석보터가 있는 만석대교에 도착했다. 강에서 밀물, 썰물의 영향이 미치는 구간을 감조구역이라고 하는데, 만석보터가 있는 곳이 딱 그 지점이다. 이곳에서 정읍천과 태인천이 서로 만나 동진강은 그 폭을 넓히며 강으로서의 본격적인 위용을 드러낸다. 

 만석대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동학농민혁명의 발단이 된 전라북도 기념물 제 33호인 3m 정도 높이의 ‘만석보유지비(萬石洑遺址碑)’가 보였다.

 

 1892년 5월에 고부 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오자마자 온갖 가렴주구를 일삼는 가운데, 농민을 함부로 징발하고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만석보를 다시 쌓고 물세(수세)명목으로 많은 세금을 거두어 들였다.

  원래 정읍천 아래에는 배들평(이평) 농민들이 쌓은 만석보가 있었다. 만석보는 광산보 또는 예동보라고도 했는데, 아무리 가물어도 이 보에는 물을 끌어다 쓰는 배들평에 농사를 지을 수 있다고 하여 만석보라고 불렀다고.

 만석보는 원성의 대상이 되었고, 1894년 조병갑의 각종 폭정과 과중한 세금부담에 허덕이던 농민들이 마침내 들불처럼 일어나 이 만석보를 때려 부숨으로써, 동학혁명의 발단이 되었는데, 동학농민혁명의 첫 횃불이 타올랐던 이곳에 1973년 동학혁명기념사업회에서 만석보유지비를 건립하였고 그 곁에 1975년 YWCA에서 ‘겨울 공화국’이라는 시를 낭독한 사건으로 교사직을 파면 당한 경력이 있는 양성우 시인이 지은 시 ‘만석보’가 정성스레 새겨진 ‘만석보시비’가 농민군을 위로 하고 있다..


 “들리는가, 친구여/갑오년 흰눈 쌓인 고부들판에/성난 아비들의 두런거리는 소리/만석보 허무는 소리가(중략)”

만석보유지비앞에 선 탐사대원들

 시를 읊조리며 만석보터에서 태인천과 배들평야, 동학농민군의 함성을 뒤로하고 탐사대 일행은 점심식사가 예정된 신태인 읍내로 가던 중 도수로에 잠시 들렸다.

 일제시대 때 호남평야의 물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섬진강의 옥정호에 있는 물을 동진강 수계로 돌려 칠보를 거쳐 태인면 낙양리에서 2개의 대간선 수로(정읍간선수로, 김제간선수로)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해방이후 또다시 67km에 이르는 동진강도수로를 만들어 정읍시 덕천, 영원을 거쳐 부안 하서면의 청호저수지에 담겨진 물이 계화간척지를 적셔 준다는 것이다. 참으로 대단한 인간의 역사(役事)가 아닐 수 없다.  이쯤에서 한마디 안할 수가 없다.

  “물, 니들이 고생이 많다.”

 

                                   

  <3회로 이어짐>

  • 글/ 오승옥
  • 사진/ 강건양
  • 기록/ 김명하
  • 탐사해설/ 박래철
  • 탐사기획/ 푸른정읍의제21(추) & 밝은신문
저작권자 © 새백제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